
세르비아 공화국(세르비아어: Република Србија 레푸블리카 스르비야), 약칭 세르비아(세르비아어: Србија 스르비야, 문화어: 쓰르비아)는 유럽 중앙의 발칸 반도 중앙 판노니아 평원에 자리 잡고 있는 내륙국이다. 세르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는 오랜 역사를 지녔으며, 남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다.
세르비아인들은 발칸 반도에 정착한 후 세르비아 왕국을 건설했으며, 이 나라는 세르비아 제국으로 발전하여 14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16세기에 세르비아 땅은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하였으며, 합스부르크의 침략을 받기도 했다. 19세기 초에 세르비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발칸 반도 최초로 입헌 군주 체제를 세웠으며, 뒤이어 영토를 늘리고 이 지역에서 봉건주의와 농노제를 폐지하는 데 앞장 섰다.[1][2]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1918년에 보이보디나 주가 세르비아에 귀속되었다. 세르비아는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및 슬로베니아를 비롯해 여타 남 슬라브 민족들과 함께 유고슬라비아로 통합하여 존속하다가 1991년에 유고슬라비아 연방 해체된 이후 몬테네그로와 함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연방을 구성하였다. 2006년 6월 5일, 두 나라도 분리되었다. 2008년 2월에 알바니아인이 다수를 이루는 남부 지역의 코소보가 독립을 선언했다. 세르비아는 코소보를 유엔 코소보 임시행정부(UNMIK)이 통치하는 자치주로 보고 그 독립을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러시아, 스페인, 그리스 등을 제외한 많은 나라들이 코소보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있다.
세르비아는 유엔, 유럽 평의회, 흑해 경제 협력 기구, 중앙유럽 자유 무역 협정 회원국이다. 국제 통화 기금에서는 세르비아를 신흥 개발도상국으로 분류하며, 세계 은행에서는 이 나라의 소득 수준을 중상류로 본다.[3] 세르비아는 인간 개발 지수가 높은 수준이며,[4] 프리덤 하우스에서는 2008년에 세르비아를 발칸 국가 가운데 몇 안 되는 '자유 국가'로 등재했다.[5] 이 나라는 유럽 연합 가입을 신청한 상태이며, 국제적으로 중립국이다.[6][7]
6세기에 발칸 반도를 침공한 슬라브족은 여러 개의 작은 왕국을 수립했지만 오래 가지 못하고 소멸되고 만다. 780년경부터 830년 사이에는 비셰슬라브(Višeslav), 라도슬라브(Radoslav), 프로시고이(Prosigoj)가 차례대로 세르비아를 지배했는데 유럽에서 경쟁 관계에 있던 불가리아 제1제국, 비잔티움 제국, 프랑크 왕국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다.
830년경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지원을 받은 블라스티미르(Vlastimir) 공작이 발칸 반도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불가리아 제1제국을 물리쳤다. 이를 계기로 세르비아에는 블라스티미로비치(Vlastimirović) 왕조의 지배를 받은 중세 세르비아 공국이 수립되었다. 850년에는 무티미르(Mutimir) 공작이 동방 정교회를 세르비아의 국교로 정하면서 기독교 세례를 받게 된다. 중세 세르비아 공국은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등으로 세력을 확장했지만 969년 비잔티움 제국에 합병되면서 소멸되고 만다.
1091년에는 현재의 노비파자르에 세워진 도시인 스타리라스를 수도로 하는 세르비아 대공국이 수립되었다. 1166년에는 스테판 네마냐가 세르비아의 대공으로 즉위한 뒤부터 세르비아의 여러 부족을 통일했다. 스테판 네마냐는 비잔티움 제국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이후에 독립된 세르비아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네마냐 왕조 시대를 열었다.
1217년에는 스테판 네마니치가 세르비아의 국왕 칭호를 받으면서 세르비아 대공국은 중세 세르비아 왕국으로 격상되었다. 1219년에는 스테판 네마니치의 동생인 성 사바에 의해 세르비아 정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세르비아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주교에서 분리된 교회로 인정받았다.
14세기 중엽에는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 발칸 반도의 대부분을 석권하는 등 세력을 떨쳤으나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패하고,[8]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결국 당시 이들의 중심지였던 보스니아는 동서양의 상반되는 세력에 오랫동안 굴복당해야 했다.[8]
1817년에는 세르비아 공국이 수립되었다. 세르비아 공국은 1830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완전한 자치권을 획득했으며 세르비아 공작의 세습도 인정받았다. 공국 수립 당시의 영토는 오스만 제국의 베오그라드 파샤 관구가 있던 곳에 불과했지만 1831년부터 1833년까지 공국의 영토가 동쪽, 남쪽, 서쪽으로 확장되었다.
1867년 4월 18일에 오스만 제국이 세르비아 공국에서 군대를 철수하면서 세르비아 공국은 사실상 독립했다. 1878년 7월 13일에 체결된 베를린 조약을 통해 오스만 제국이 세르비아 공국의 독립을 법적으로 승인하면서 세르비아 공국은 국제적인 승인을 받았다. 1882년을 기해 세르비아 왕국으로 개편되었다.
세르비아 왕국은 민족적으로는 슬라브족에 속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간섭에서 자유롭지 못하였으므로 범슬라브주의와 범게르만주의가 교착되는 등 국내 정세가 복잡하였다. 알렉산다르 1세가 1903년에 서거한 뒤, 다음 왕인 페타르 1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노력하였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력확장 정책과 유럽 열강들의 이해 대립이 발칸을 화약고와 같은 상태로 몰아넣었다.
1908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병합되고, 1914년에는 세르비아의 대학생인 가브릴로 프린치프에 의한 총격이 발생하여,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사라예보 사건이라 한다.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 출신의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한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 뒤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게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집요한 침략에 세르비아는 잘 막아냈지만, 1916년 2월부터 한동안 점령당했다. 1918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빼앗긴 땅을 수복하고 보이보디나 주를 편입하였으며, 1920년에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진행 중이던 1941년 3월 25일에는 추축국 진영에 가담했지만 같은 해 3월 27일에 일어난 친(親)영국파 세력의 쿠데타로 인해 탈퇴하고 만다. 추축국 진영에 있던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은 이에 대한 보복 조치로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게 된다.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의 지원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활동을 통해 1943년부터 1945년 사이에 영토를 수복했다. 이를 계기로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수립하게 된다.
1980년 티토가 사망한 이후에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민족주의 여론이 형성되었다. 동구권의 민주 혁명 및 민족주의가 대두함에 따라 1991년부터 1992년까지 사이에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공화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차례로 유고슬라비아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연방의 중추적 국가였던 세르비아가 이에 반발하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에서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일으켰다. 세르비아 군인들은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보스니아 전쟁, 코소보 전쟁에서 민족 청소 등 반인륜적 전쟁 범죄를 자행했는데 이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와 미국의 군사 개입을 부르게 된다.
2003년 2월에는 신 유고 연방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개명하였으며, 2006년 5월 몬테네그로가 분리 독립 투표에서 독립을 가결시킴으로써 같은 해 6월 5일에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가 해체되어 세르비아 공화국과 몬테네그로 공화국으로 분리되었다. 2008년 2월 17일, 코소보가 세르비아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하였다.
세르비아는 남동부 유럽 발칸 반도의 판노니아 평원에 자리잡고 있으며, 다뉴브 강이 북쪽 지방을 흘러간다. 세르비아는 북쪽으로 헝가리, 동쪽으로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서쪽으로 크로아티아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몬테네그로, 남쪽으로 마케도니아 공화국과 국경을 접하며, 남쪽의 코소보와 분쟁 중에 있다.
동쪽 국경에는 카르파티아 산맥이 있고, 벨리카 모리카라고 하는 500km 길이의 강이 흐른다. 남동부 지방에는 발칸 산맥이 로도프 산맥과 맞닿아 있고, 그리스와 마주한다. 세르비아 영토의 4분의 1 이상은 숲으로 되어 있다.
세르비아는 29개 구(세르비아어: Округ, okrug)와 1개 특별시(베오그라드 시)로 구성되어 있다.
세르비아는 헝가리인이 많이 사는 보이보디나 자치주와 알바니아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코소보 자치주를 포함했었다. 그러나, 코소보는 코소보 전쟁 이후 유엔의 관할 아래 있어 사실상 세르비아의 주권이 미치지 못했고, 미국과 영국 등 서방국가들의 지원 하에 2008년 2월 17일 독립을 선언해 세르비아의 통치 지역에서 분리 독립되었다.
의원내각제 국가인 세르비아는 대통령보다 총리의 실권이 크고, 대통령은 상징적인 역할에 머물고 있으나 부치치 총리가 대통령이 되면 대통령의 권한이 지금보다 훨씬 강화될 것으로 관측된다. 유고 내전의 여파로 얼마 전까지 극우 민족주의 정당인 세르비아 급진당이 집권했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익 정당인 세르비아 진보당이 집권하게 되었다.
세르비아의 주요 정당들은 이렇다.
2017년 기준, 세르비아 인구는 702.2만명이다. 남슬라브족의 일파인 세르비아인이 인구의 83%로 다수를 점하고 있다. 두 번째로 많은 헝가리인(3.9%)은 보이보디나를 중심으로 많이 거주하고 있고, 보스니아인(1.8%), 롬족(1.4%), 그 밖에 다른 민족인 알바니아인, 크로아티아인, 불가리아인 등이 거주한다.
세르비아어가 공용어이다. 키릴 문자와 로마자 모두 사용되나, 키릴 문자의 사용이 보다 보편적이다. 크로아티아어나 보스니아어와는 유고슬라비아 시절에는 방언적 차이에 불과했으나, 현재 정치적인 대립을 배경으로 급속히 분화하는 중이다.
2006년 10월 28일과 29일에 실시한 국민투표로 확정한 헌법 10조 1항에 "세르비아공화국에서는 세르비아어와 키릴문자가 공식적으로 사용된다."라고 규정했다. 보이보디나 자치주에서는 헝가리계 주민 상당수가 모어(母語)로 헝가리어를 쓰며, 그 밖에 소수 민족 언어도 일부 사용된다.
세르비아는 2006년 9월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프랑코포니 정상회담에 따라 참관국 자격을 획득하였으나, 프랑스어의 사용은 제한적이다.
종교 인구의 85%는 세르비아 정교회(주로 세르비아인)로서 다수를 점하고 있으며, 가톨릭(주로 헝가리인과 크로아티아인)이 5.5%, 무슬림(주로 보스니아인과 알바니아인)이 3.2%, 개신교가 1.1%이다.
공산주의 붕괴에 따라 1992년 계획경제에서 혼합경제로 전환하여 경제 발전을 시작했으나, 유고슬라비아 전쟁과 그로 인한 UN의 경제제재로 어려움을 겪었다. 2003년에는 당재산의 사유화와 외자유치를 추진했지만, 2004년에는 외국인 투자가 절반 수준으로 떨어지고 무역적자가 커져 그를 메워줄 경제와 산업이 필요하다. 광공업이 발달했지만, 헝가리나 폴란드에 비해 경제 발전이 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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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인들은 발칸 반도에 정착한 후 세르비아 왕국을 건설했으며, 이 나라는 세르비아 제국으로 발전하여 14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16세기에 세르비아 땅은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하였으며, 합스부르크의 침략을 받기도 했다. 19세기 초에 세르비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발칸 반도 최초로 입헌 군주 체제를 세웠으며, 뒤이어 영토를 늘리고 이 지역에서 봉건주의와 농노제를 폐지하는 데 앞장 섰다.[1][2]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1918년에 보이보디나 주가 세르비아에 귀속되었다. 세르비아는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및 슬로베니아를 비롯해 여타 남 슬라브 민족들과 함께 유고슬라비아로 통합하여 존속하다가 1991년에 유고슬라비아 연방 해체된 이후 몬테네그로와 함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연방을 구성하였다. 2006년 6월 5일, 두 나라도 분리되었다. 2008년 2월에 알바니아인이 다수를 이루는 남부 지역의 코소보가 독립을 선언했다. 세르비아는 코소보를 유엔 코소보 임시행정부(UNMIK)이 통치하는 자치주로 보고 그 독립을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러시아, 스페인, 그리스 등을 제외한 많은 나라들이 코소보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있다.
세르비아는 유엔, 유럽 평의회, 흑해 경제 협력 기구, 중앙유럽 자유 무역 협정 회원국이다. 국제 통화 기금에서는 세르비아를 신흥 개발도상국으로 분류하며, 세계 은행에서는 이 나라의 소득 수준을 중상류로 본다.[3] 세르비아는 인간 개발 지수가 높은 수준이며,[4] 프리덤 하우스에서는 2008년에 세르비아를 발칸 국가 가운데 몇 안 되는 '자유 국가'로 등재했다.[5] 이 나라는 유럽 연합 가입을 신청한 상태이며, 국제적으로 중립국이다.[6][7]
6세기에 발칸 반도를 침공한 슬라브족은 여러 개의 작은 왕국을 수립했지만 오래 가지 못하고 소멸되고 만다. 780년경부터 830년 사이에는 비셰슬라브(Višeslav), 라도슬라브(Radoslav), 프로시고이(Prosigoj)가 차례대로 세르비아를 지배했는데 유럽에서 경쟁 관계에 있던 불가리아 제1제국, 비잔티움 제국, 프랑크 왕국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다.
830년경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지원을 받은 블라스티미르(Vlastimir) 공작이 발칸 반도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불가리아 제1제국을 물리쳤다. 이를 계기로 세르비아에는 블라스티미로비치(Vlastimirović) 왕조의 지배를 받은 중세 세르비아 공국이 수립되었다. 850년에는 무티미르(Mutimir) 공작이 동방 정교회를 세르비아의 국교로 정하면서 기독교 세례를 받게 된다. 중세 세르비아 공국은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등으로 세력을 확장했지만 969년 비잔티움 제국에 합병되면서 소멸되고 만다.
1091년에는 현재의 노비파자르에 세워진 도시인 스타리라스를 수도로 하는 세르비아 대공국이 수립되었다. 1166년에는 스테판 네마냐가 세르비아의 대공으로 즉위한 뒤부터 세르비아의 여러 부족을 통일했다. 스테판 네마냐는 비잔티움 제국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이후에 독립된 세르비아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네마냐 왕조 시대를 열었다.
1217년에는 스테판 네마니치가 세르비아의 국왕 칭호를 받으면서 세르비아 대공국은 중세 세르비아 왕국으로 격상되었다. 1219년에는 스테판 네마니치의 동생인 성 사바에 의해 세르비아 정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세르비아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주교에서 분리된 교회로 인정받았다.
14세기 중엽에는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 발칸 반도의 대부분을 석권하는 등 세력을 떨쳤으나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패하고,[8]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결국 당시 이들의 중심지였던 보스니아는 동서양의 상반되는 세력에 오랫동안 굴복당해야 했다.[8]
1817년에는 세르비아 공국이 수립되었다. 세르비아 공국은 1830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완전한 자치권을 획득했으며 세르비아 공작의 세습도 인정받았다. 공국 수립 당시의 영토는 오스만 제국의 베오그라드 파샤 관구가 있던 곳에 불과했지만 1831년부터 1833년까지 공국의 영토가 동쪽, 남쪽, 서쪽으로 확장되었다.
1867년 4월 18일에 오스만 제국이 세르비아 공국에서 군대를 철수하면서 세르비아 공국은 사실상 독립했다. 1878년 7월 13일에 체결된 베를린 조약을 통해 오스만 제국이 세르비아 공국의 독립을 법적으로 승인하면서 세르비아 공국은 국제적인 승인을 받았다. 1882년을 기해 세르비아 왕국으로 개편되었다.
세르비아 왕국은 민족적으로는 슬라브족에 속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간섭에서 자유롭지 못하였으므로 범슬라브주의와 범게르만주의가 교착되는 등 국내 정세가 복잡하였다. 알렉산다르 1세가 1903년에 서거한 뒤, 다음 왕인 페타르 1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노력하였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력확장 정책과 유럽 열강들의 이해 대립이 발칸을 화약고와 같은 상태로 몰아넣었다.
1908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병합되고, 1914년에는 세르비아의 대학생인 가브릴로 프린치프에 의한 총격이 발생하여,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사라예보 사건이라 한다.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 출신의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한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 뒤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게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집요한 침략에 세르비아는 잘 막아냈지만, 1916년 2월부터 한동안 점령당했다. 1918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빼앗긴 땅을 수복하고 보이보디나 주를 편입하였으며, 1920년에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진행 중이던 1941년 3월 25일에는 추축국 진영에 가담했지만 같은 해 3월 27일에 일어난 친(親)영국파 세력의 쿠데타로 인해 탈퇴하고 만다. 추축국 진영에 있던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은 이에 대한 보복 조치로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게 된다.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의 지원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활동을 통해 1943년부터 1945년 사이에 영토를 수복했다. 이를 계기로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수립하게 된다.
1980년 티토가 사망한 이후에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민족주의 여론이 형성되었다. 동구권의 민주 혁명 및 민족주의가 대두함에 따라 1991년부터 1992년까지 사이에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공화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차례로 유고슬라비아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연방의 중추적 국가였던 세르비아가 이에 반발하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에서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일으켰다. 세르비아 군인들은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보스니아 전쟁, 코소보 전쟁에서 민족 청소 등 반인륜적 전쟁 범죄를 자행했는데 이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와 미국의 군사 개입을 부르게 된다.
2003년 2월에는 신 유고 연방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개명하였으며, 2006년 5월 몬테네그로가 분리 독립 투표에서 독립을 가결시킴으로써 같은 해 6월 5일에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가 해체되어 세르비아 공화국과 몬테네그로 공화국으로 분리되었다. 2008년 2월 17일, 코소보가 세르비아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하였다.
세르비아는 남동부 유럽 발칸 반도의 판노니아 평원에 자리잡고 있으며, 다뉴브 강이 북쪽 지방을 흘러간다. 세르비아는 북쪽으로 헝가리, 동쪽으로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서쪽으로 크로아티아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몬테네그로, 남쪽으로 마케도니아 공화국과 국경을 접하며, 남쪽의 코소보와 분쟁 중에 있다.
동쪽 국경에는 카르파티아 산맥이 있고, 벨리카 모리카라고 하는 500km 길이의 강이 흐른다. 남동부 지방에는 발칸 산맥이 로도프 산맥과 맞닿아 있고, 그리스와 마주한다. 세르비아 영토의 4분의 1 이상은 숲으로 되어 있다.
세르비아는 29개 구(세르비아어: Округ, okrug)와 1개 특별시(베오그라드 시)로 구성되어 있다.
세르비아는 헝가리인이 많이 사는 보이보디나 자치주와 알바니아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코소보 자치주를 포함했었다. 그러나, 코소보는 코소보 전쟁 이후 유엔의 관할 아래 있어 사실상 세르비아의 주권이 미치지 못했고, 미국과 영국 등 서방국가들의 지원 하에 2008년 2월 17일 독립을 선언해 세르비아의 통치 지역에서 분리 독립되었다.
의원내각제 국가인 세르비아는 대통령보다 총리의 실권이 크고, 대통령은 상징적인 역할에 머물고 있으나 부치치 총리가 대통령이 되면 대통령의 권한이 지금보다 훨씬 강화될 것으로 관측된다. 유고 내전의 여파로 얼마 전까지 극우 민족주의 정당인 세르비아 급진당이 집권했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익 정당인 세르비아 진보당이 집권하게 되었다.
세르비아의 주요 정당들은 이렇다.
2017년 기준, 세르비아 인구는 702.2만명이다. 남슬라브족의 일파인 세르비아인이 인구의 83%로 다수를 점하고 있다. 두 번째로 많은 헝가리인(3.9%)은 보이보디나를 중심으로 많이 거주하고 있고, 보스니아인(1.8%), 롬족(1.4%), 그 밖에 다른 민족인 알바니아인, 크로아티아인, 불가리아인 등이 거주한다.
세르비아어가 공용어이다. 키릴 문자와 로마자 모두 사용되나, 키릴 문자의 사용이 보다 보편적이다. 크로아티아어나 보스니아어와는 유고슬라비아 시절에는 방언적 차이에 불과했으나, 현재 정치적인 대립을 배경으로 급속히 분화하는 중이다.
2006년 10월 28일과 29일에 실시한 국민투표로 확정한 헌법 10조 1항에 "세르비아공화국에서는 세르비아어와 키릴문자가 공식적으로 사용된다."라고 규정했다. 보이보디나 자치주에서는 헝가리계 주민 상당수가 모어(母語)로 헝가리어를 쓰며, 그 밖에 소수 민족 언어도 일부 사용된다.
세르비아는 2006년 9월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프랑코포니 정상회담에 따라 참관국 자격을 획득하였으나, 프랑스어의 사용은 제한적이다.
종교 인구의 85%는 세르비아 정교회(주로 세르비아인)로서 다수를 점하고 있으며, 가톨릭(주로 헝가리인과 크로아티아인)이 5.5%, 무슬림(주로 보스니아인과 알바니아인)이 3.2%, 개신교가 1.1%이다.
공산주의 붕괴에 따라 1992년 계획경제에서 혼합경제로 전환하여 경제 발전을 시작했으나, 유고슬라비아 전쟁과 그로 인한 UN의 경제제재로 어려움을 겪었다. 2003년에는 당재산의 사유화와 외자유치를 추진했지만, 2004년에는 외국인 투자가 절반 수준으로 떨어지고 무역적자가 커져 그를 메워줄 경제와 산업이 필요하다. 광공업이 발달했지만, 헝가리나 폴란드에 비해 경제 발전이 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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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호텔 그랑비아 추천, 오사카역과 백화점...
그랑비아 위치 참 괜찮죠~ ^^ 지하철역, JR 오사카역이 지하라서 관광 다니기도 좋고요. 입지에서 100점 만점에 100점 주고 싶은 호텔이었습니다. 교토에 가보니 교토에서도 호텔 그란비아는 교토역 윗층이라 입지가 정말 좋더라... -
푸에르타 델 솔과 그랑비아 거리
초 그란비아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쇼핑의 중심지로 유서 깊은 상점들도 많다. 가장 스페인다운 물건을 사려면 이 곳까지 와야 한다. 또한 이 곳은 1808년 스페인을 침략한 나폴레옹군에게 세계 최초로 대항한 장소로, 이후... -
[스페인] 태양의 나라 스페인 마드리드 이야기 - 3
그랑비아 거리 & 푸에트라 델 솔 광장 20세기 초에 미국 브로드웨이를 본떠서 만들었다고 하는 그랑비아 거리는 그란비아 중심으로 남쪽에는 구시가, 북쪽에는 신시가지로 나뉘어진다. 그랑비아 거리 주변에는 쇼핑 거리로 수... -
(스폐인광장, 왕궁, 솔광장, 그랑비아, 카페오리엔...
더위에 먹고 그 벌개진 얼굴로 돌아다닐 수 없다하여 참았습니다. ㅋㅋ 그렇게 솔 광장 주변을 구경하고 전 이제 그란비아거리쪽으로 갔어요. 그란비아거리는 마드리드 시내의 메인 스트리트로 최대 쇼핑 번화가에요. 흠 - 마드리... -
마드리드 우체국 & 그랑비아 거리 메트로폴리스
마드리드 우체국이 반겨줍니다. 저렇게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이 우체국이라니. ㅋㅋ 어마어마하네요. 마드리드 그랑비아 거리의 기점이 되는 메트로 폴리스(Metropolis) 거리입니다. 안에는 쇼핑타운이 입점해있다고 해요. ㅋㅋ... -
주현절 퍼레이드로 시끌벅적한 그라나다의 그란비아
어느새 그랑비아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광장 한복판에는 TV 카메라도 설치해놓고, 거리마다 사람들이 아예 앉아있다. 교통은 이미 통제된 상태. 처음에는 '아까도 이렇게 사람들이 많았나' 하고 내 갈길 가려다가 뭔가... -
마드리드의 추억 - 마요르광장과 그란비아
광장 → 그랑비아(숙소가 있는~) 까지 각각 도보로 5~10분 정도가 소요될 것이다. 물론 가는 길에 구경 거리도 엄청 많을 것이고~~~ 솔광장에 도착~ 도로 원점이 되는 곳을 찾아가서 또 한번 꽉~ 밟아주고 ~ 여기를 밟고 가면... -
왕궁, 스페인광장, 그란비아거리 피자 papizza 맛집...
반대편 이제 우린 스페인광장으로~~ 아~ 4월의 스페인의 햇살은 참 따갑다! 한여름인줄... ㅋㅋㅋ 이제 우리는 그랑비아 거리로 고고~~ 가는데 이 역 앞에 있는 곳에 피자집 발견!! 이 피자집은 해피아워타임이 있어서 모든... -
[오사카 호텔] 호텔 그랑비아 오사카
금연입니다. 플로어 안에 흡연 부스가 있습니다) ? ? ? * 그랑비아 플로어 프라시드 더블 * ? ??회색과 베이지 색, 그리고 부드러운 폼의 조명이 부드러운 시간을 연출합니다. (그란비아 플로어에 금연입니다. 플로어 안에 흡연... -
마이스테이스 호텔 / 오사카 그란비아 호텔 이용 후기
있음. ( 완전 따뜻하다 못해 건조하게 잠 ) 2박 지내기에 매우 편하고 좋았음. + Hotel Granvia Osaka 오사카 그랑비아 호텔 1일 191,928원 마지막 일정이라서 제일 고민 많이 했던 호텔인데, 길 안 헤맬려고 비싸도 그냥 했는데... -
오사카 그란비아 호텔, 오사카 추천 호텔 리뷰
잘 풀어줘야 그 다음날 일정도 잘 소화할 수 있고 편하고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면에서 그랑비아는 새로 리뉴얼하면서 세련되고 깨끗한 룸을 보유하고 있고 침구도 하얀 순면으로 깨끗하기 때문에 편히... -
[2번째 우리의 만남 Spain] 너무나 아름다웠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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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로의 유럽] 스페인(5) - 마드리드
스티치책에 설명된 데로 그란비아(Calle Gran Via)가 시작된다. 그랑비아는 마드리드의 중심을 형성하는 구 시가지인데 각종 상점들과 백화점이 들어서 있다. 그란비아를 길을 따라 내려오면 펼쳐지는 푸에르타 델 솔 (Puerta... -
서유럽 19박20일〃스페인 #85 :: 마드리드 - 마드리...
건물도 예쁘고 랜드마크라 할 수 있겠네요 ㅋ 그리고 이리로 올라가면 바로 그랑비아 거리죠?! ? 첫 날 봤던 이 건물 메트로폴리스와 롤렉스가 써있던 그란비아의 초입부 건물 :) ? 다들 예뻐요 이번엔<<요쪽 길로 휙 돌아서... -
스페인, 포르투갈 #03.1일차 - 마드리드, 나이트...
마요르거리 - 알무데나 성당 - 마드리드 왕궁 - 오페라 왕립극장 - 스페인 광장 - 그란비아 거리 까지... 4시간에 걸치 투어 코스이다. 그랑비아 모습. 내게 스페인의 첫 이미지가 이 도로였는데, 말 그대로 'Grand' 하다. 프라도... -
스페인 11박 12일 - 그라나다 (8일 째: 2011.01.26 )
가기 위해 그랑비아 거리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랑비아 거리로 향하는 버스는 터미널 바로 앞쪽에 있다. "Hotel Roommate leo" 좁긴 하지만 객실이 깔끔하며 그란비아 거리에 위치하여 관광지 접근도면에서 우수하다... -
마드리드
분위기에 한껏 취해 보자. 에스파냐 광장에서 그랑비아 거리 끝에 오면 '메트로 폴리스'라는 이런 건물이 보인다. 시벨레스 광장(Plaza de Cibeles)은 알깔라 거리에서 그란비아로 가는 입구에 해당한다. 광장 중앙에 있는... -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기 41 그라나다 : 언제나...
않는다. 그랑비아를 따라서 도로를 거꾸로 거슬러올라갔다. 배낭이 무거운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지 생각하면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다보니 선수들 물마시는 음수대가 나온다. 그라나다 마라톤. 진행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
투우의 나라 스페인을 찾아서
상 그란비아 거리의 서쪽 끝에 있는 에스파냐 광장 중앙에 스페인 대표적 작가 세르반테스 서거 300주년을 기념해 세운 기념비와 세르반테스 상이다 ▼ 돈키호테상 (스페인광장) ▼ 콜럼버스의 항해일지를 나타낸 돌로 된 기념물... -
[마드리드] 솔광장, 산 미구엘 시장, 마요르광장...
걔는 그란비아 쪽에 있는 숙소라고 해서 짧게 인사만 나누고 바이바이. 한국인들 가는 코스야 뭐 다 비슷비슷하지 말입니다. 아무튼 숙소에 짐 풀고 프라도 미술관 무료입장인 6시까지 마드리드 시내를 어슬렁거려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