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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년 8월 6일 (음력 7월 8일[6]) ~ 1786년 11월 4일 (음력 9월 14일[7]))의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이름은 덕임(德任)이다. 정조의 첫 번째 후궁이자 유일한 승은후궁이고, 문효세자의 생모이다. 1762년(영조 38년)에 입궁했고 헌경왕후가 친히 길렀다. 1766년(영조 42년)에 정조가 승은을 내리자 사양했다. 정조는 이를 받아들였으나 후궁의 반열에 뒀다. 1780년(정조 4년)에 다시 승은을 내리자 거듭 사양했다. 이에 정조가 의빈의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리자 후궁이 되었다. 두 번의 유산을 겪고 문효세자옹주를 낳았으나 모두 요절했고, 고칠 수 없는 병으로 인하여 1786년(정조 10년) 음력 9월 14일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만삭으로 사망했다. 본래 의빈궁(宜嬪宮)은 칠궁(七宮)에 있었는데 1908년(순종 2년)에 제사 제도가 개정되어 신위는 매안되었으나 제사는 원소(園所)의 예를 따랐다.
의빈 성덕임(宜嬪 成德任)은 1753년(영조 29년) 음력 7월 8일에 태어났다.[6] 아버지는 증 찬성 성윤우이고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임씨로 통례원 종6품 인의로 재직한 임종주의 딸이다. 아버지 성윤우는 본래 승지 한준증의 청지기인데 한준증이 사망한 뒤 홍봉한의 청지기가 되었다. 그러던 중 한준증의 양자 한문홍 덕분에 한때 재령의 군수가 되었지만, 몹시 가난해서 쌀과 피륙을 위해 아문(급이 높은 관청을 통틀어 이름)의 고직(관아 창고를 지키고 감시함)에게 이따금 궁색한 도움을 받았다.[8] 그러나 7천 냥을 횡령해서 거의 죽기 직전까지 고문당했다. 곧 혜경궁이 성덕임을 궁녀로 거두어 친히 길렀고 성덕임은 혜경궁을 모셨다.[9]
1766년(영조 42년),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가 승은을 내리자 울면서 세손빈이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하여 감히 승은을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며 죽음을 맹세했다.[10] 궁녀가 승은을 거부하는 일은 죽어 마땅할 만큼 큰 죄지만 정조는 그 뜻을 받아들이고 재촉하지 않았다. 성덕임이 자라자 혜경궁은 정조를 지극하게 따르라고 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 1780년에 정조가 다시 승은을 내렸지만 거듭 사양했다. 이에 사속(궁녀가 부리는 하인)을 크게 꾸짖고 벌을 내리자 정조의 승은을 받아들이고 후궁이 되었다.[11]
1773년(영조 49년) 봄, 당시 혜경궁 홍씨 처소의 궁녀였던 성덕임은 21세의 나이에 정조의 두 여동생 청연공주(당시 20세), 청선공주(당시 18세), 궁녀 영희, 경희, 복연과 함께 국문소설 《곽장양문록》(전 10권 10책)을 필사하였다. 이 소설은 필사 시기가 알려진 소설 가운데 최고로 오래된 필사소설이며, 의빈이 필사한 부분의 하단에는 '의빈 글시'라고 표기되어 있다.[12][13] 정조는 "의빈의 붓글씨가 범상함을 넘어섰다"고 표현했다.[14]
『이재난고』에 따르면 화빈 윤씨의 산실청을 1780년(정조 4년) 1월에 세우고 분만을 앞두고 있고, 궁녀(성덕임)도 임신한지 여러 달이 되었다고 한다.[15] 「어제의빈묘지명」에서는 15년 동안 원빈 홍씨화빈 윤씨를 간택 하고나서 다시 승은을 내렸지만 거듭 사양했고, 이에 성덕임의 하인에게 죄를 꾸짖고 벌을 내리자 비로소 성덕임이 정조의 마음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이재난고와 어제의빈묘지명을 참고하면 정조는 성덕임에게 거절당한 1766년을 한 해로 셈하여 15년의 시간을 산정 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성덕임은 화빈 윤씨가 입궁한 뒤에 정조의 승은을 받아들였고 늦어도 그해 11월에는 임신 했다고 간주할 수 있다. 하지만 아기를 낳았다는 기록이 없는 점으로 보아 유산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해 『이재난고』에 따르면 황윤석이 7월에 성씨(성덕임)가 임신했다는 말을 들었다.[16] 하지만 그해 실록과 일성록에도 해산 했다는 기록이 없는 점으로 보아 유산한 것으로 간주 된다.
1782년 음력 4월 30일, 일성록에 간접적으로 처음 등장한 뒤,[17] 그해 음력 8월 26일 자의 기록이 실록에 처음 직접 등장했다.[18] 권초관은 본래 비빈이 해산할 때 권초례를 행하기 위한 임시 관직이다. 그런데 상의의 임신에 권초관을 임명한 것을 보면, 당시 정조가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수빈 박씨 소생의 순조와 숙선옹주의 경우, 태어난 당일에야 권초관을 임명한 것과 비교해보면 매우 빨리 권초관이 임명된 것이다.
1782년 음력 9월 7일 인시(새벽 3시~5시), 성덕임은 창덕궁 연화당(讌華堂)에서 문효세자를 낳았다.[19]
“궁인(宮人) 성씨(成氏)가 태중(胎中)이더니 오늘 새벽에 분만하였다. 종실이 이제부터 번창하게 되었다. 내 한 사람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이 나라의 경사가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으므로 더욱더 기대가 커진다. ‘후궁은 임신을 한 뒤에 관작을 봉하라.’는 수교(受敎)가 이미 있었으니, 성씨를 소용(昭容)으로 삼는다.” 하니, 신하들이 경사를 기뻐하는 마음을 아뢰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하였다. 또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불러 보았는데, 모두가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조종께서 우리 나라를 돌보시어서 남아가 태어난 경사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달은 우리 선대왕께서 탄생하신 달이고 우리 전하께서 탄생하신 달인데다가 왕자께서 또 이 달에 탄생하셨으니, 경사에 대한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신이 뜨락에서 문안을 올리려고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명호(名號)를 정하기 전에 뜨락에서 문안을 드리는 것은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다. 더구나 을묘년에도 이러한 예가 없었으니, 하지 말도록 하라.”
정조가 효의왕후, 원빈 홍씨, 화빈 윤씨 사이에서 자식이 없어서 나라에 근심이 깊은데 성덕임이 아들을 낳자 왕실과 조정에서는 홍복이었다. 해산 당일에 호산청(후궁이 아기를 낳을 때 임시로 설치하는 관청)을 설치하였고[21], 음력 9월 13일에 호산청이 철수 되었다.[22] 혜경궁은 성덕임이 문효세자를 낳을 때 자신의 친정에서 데려온 유모 '아지'와 몸종 '복례'를 보내 도왔다.[23]
궁중 여인은 대개 거처하는 처소에서 아기를 낳았다. 경종은 희빈 장씨의 처소 취선당(就善堂)에서 태어났고,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처소 경춘전(慶春殿)에서 태어났다. 이로 말미암았을 때 성덕임의 처소는 문효세자를 낳은 연화당(讌華堂)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추정을 토대로 보면 당시 상의(정5품)였던 성덕임이 전(殿) 다음으로 높은 당(堂)에서 거처했다는 것은 성덕임이 정조에게 얼마나 사랑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연화당(讌華堂)은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일상 업무를 보던 선정전(宣政殿) 동쪽에 있었다. 왕의 침전이자 집무실로 쓰인 희정당(熙政堂)도 선정전 동쪽에 있었다. 정조가 문효세자를 위해 지은 중희당도 연화당 근처에 있었다.
성덕임은 정조실록에서 1782년 음력 12월 28일에 정3품 소용으로 품계가 올랐다. 반면 일성록에 따르면 1782년 음력 9월 7일에 "소용방에 공상하는 등의 일을 규례대로 거행하라고 명하였다."고 했고, 같은 해 음력 9월 15일 상정각(誠正閣)에서 열린 차대(次對: 임금이 의정부와 삼사의 당상관들과 하는 정책회의)에서 정조가 ‘소용(昭容)’이라고 칭했다. 그런데 그 날 성덕임의 오빠 성식(成軾)이 정조에 의해 파면 당했다.
“내가 조신(朝臣)들에게 유시(諭示)하고 싶은 것이 있다. 예로부터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왕실의 척족(戚族)들은 매양 연줄을 타고 내통하여 조정에 해를 끼친 폐단이 많았다. 더구나 부덕한 내가 대비하고 더 금지하지 않는다면 그로 인한 폐단을 장차 말로 할 수 없을 것이므로 내가 즉위한 뒤로 척리(戚里)들을 단속하는 것을 먼저 처리할 중요한 일로 삼았으니, 나의 이러한 마음을 경들도 틀림없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인심이 예전만 못하고 세도(世道)가 날로 떨어지는 때를 당하여 만약 이 무리들이 자신의 본분을 지키지 않고 조정의 신하와 혹 서로 내통한다면 치화(治化)에 누가 될 뿐만이 아니니, 어찌 조정이 대단히 수치스럽게 여길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것을 염려하여 일전에 소용(昭容)의 오라비를 합문(閤門) 밖에 불러 놓고 만일 이러한 폐단이 있게 되면 극형에 처하는 죄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거듭거듭 신칙(申飭)하고 유시(諭示)하였다. 오늘 연석(筵席)에 오른 제신(諸臣)들에게 어찌 이러한 염려가 있겠는가마는 모쪼록 이 하교를 듣고 서로 타일러 훈계하게 되기를 나는 바란다.”
하니, 서명선이 아뢰기를,
“지금 성상의 하교를 받들었으니 물러가 각자 경계하고 신칙할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듣건대, 소용의 오라비 성식(成軾)이 현재 어영청 군교의 직임을 맡고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로 하여금 외인(外人)과 내통하게 해서는 안 된다. 금장(禁將)이 어영대장을 겸하고 있으니 즉시 그의 직임을 태거(汰去)하라.
하니, 사직 이경무(李敬懋)가 아뢰기를,
“마땅히 하교하신 대로 받들어 행하겠습니다.” 하였다."[24]
정조는 예전에 성식을 편전 앞문 밖에 불러서 성덕임과 왕자의 연줄을 타고 내통하면 극형으로 다스릴 것이라며 단단히 타일러 경계하고 가르쳤었다. 낮은 벼슬에 불과한 어영청 군교 직위를 파면한 이유는 황윤석의 《이재난고》에 나타나 있는데 정치적인 문제였다. 성식은 당시에도 계속 유지 되고 있던 화빈 윤씨의 산실청 문제로 군문의 명령을 받고 호조 서리가 되었다.
1782년 음력 11월 27일에는 맏아들의 원자 위호(작위와 명호)가 정해졌다. 1783년 음력 2월 19일에는 의빈(宜嬪)으로 승격 되었는데 이 때 빈호 '의(宜)'는 정조가 직접 정했다.
하여, 하교하기를,
의(宜) 자로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소용궁에게 올릴 빈호를 의(宜) 자로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정관을 패초하여 정사를 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하교하기를,
“빈(嬪)으로 봉작(封爵)하는 관교(官敎)는 작년에 이미 옥새를 찍어 하비하였으니, 자호(字號)를 정사를 열어서 거행할 필요는 없다. 다만 지방에 있는 낭관을 재촉해서 올라오게 한 후에 전해 주도록 하라.”
1784년(정조 8년) 윤 3월 20일에는 옹주를 낳았다. 맏아들 문효세자 때처럼 해산 당일에 호산청이 설치되었고[26], 6일 뒤에 철수되었다. 그해 음력 7월 2일에는 맏아들이 3세의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 되었다. 정조의 차남 순조가 1800년(정조 24년) 음력 1월 1일, 11세가 되어서야 왕세자로 책봉된 것과 비교하면 무척 이른일이었다.[27] 그리고 의빈의 오빠 성식(成軾)과 이름 불명의 다른 오빠는 동궁의 내례가 되었다. 1786년이 되자 의빈이 또 임신 했다. 의빈이 왕세자를 낳기 전까지 왕실과 조정에서는 후사가 없어서 상당히 걱정했었다. 왕세자가 태어난 이후 계속 임신을 하고, 자식이 태어나자 의빈은 궁중에서 홍복이었다. 혜경궁이 복스러운 얼굴을 칭찬하고, 정조가 지극히 사랑하고, 효의왕후가 친애했다.
1780년(정조 4년) 음력 12월과 1781년(정조 5년) 음력 7월에 임신 중이었지만 유산 했고, 1784년(정조 8년) 윤달 3월 20일에 태어난 옹주는 같은해 5월에 궁궐 밖으로 피접을 나갔는데 음력 5월 12일에 경풍(驚風, 갑자기 몹시 놀라서 정신을 잃고 넘어지며 몸이 싸늘해짐)으로 매우 급작스럽게 사망했다.[28][29] 정조의 총애를 받는 신하 임율이 옹주를 치료하는 중이었는데, 옹주가 죽자 임율이 장례를 치렀다.[30] 이후 1786년 음력 5월 3일에는 왕세자가 홍역 증세가 있어서 의약청(議藥廳)을 설치했다. 5월 6일부터 호전 되었지만 5월 10일부터 다시 심해지더니 5월 11일 미시(오후 1시~3시)에 창경궁 자경전 동쪽 행각에서 사망했다.
문효세자국휼고유제축문(文孝世子國恤告由祭祝文)
宜嬪葬禮時孝昌墓告由祭祝文 爾墓之左卜宜嬪宅往卽在今幽明慟䀌
정조실록 22권, 정조 10년 윤7월 19일 경인

1786년 윤7월 19일, 문효세자를 효창묘에 장사지낼 때 정조가 그 자리에 있었다. 의빈 역시 문효세자의 생모로서 정조와 함께 효창묘에 있었다.
정조가 “부인의 마음이 약하여 칠정 증세가 있다. 자연히 5월 이후 중병에 걸렸고 이에 본궁으로 피접을 보냈다.”고 했다.[33] 칠정(七情)은 사람의 일곱 가지 심리를 뜻한다. 이는 의빈에게 마음의 병이 있었는데 문효세자 사망 이후 마음의 병이 몸의 병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정조가 의빈을 돈의문으로 나가게 하여 경희궁으로 피접을 보냈고, 윤달 7월 21일부터 음력 9월 7일까지 경희궁과 창덕궁을 오가며 지냈으니 의빈은 아무리 늦어도 윤달 7월 21일에는 피접을 떠났다.[34]
정조가 1786년 음력 7월 25일에 혼궁에서 전작례를 거행하고 밤을 지냈는데, 의빈이 문효세자의 혼궁이 있는 태녕전에서 밤을 지새운 일화와 상응한다. 의빈은 혼궁에서 돌아가는 길에 처음 어지러움을 느끼고 쉬었으나 몸이 거북했다고 한다.[35] 하지만 정조가 한 말을 보면 이전부터 몸이 좋지 못했다.
의빈이 경희궁으로 피접을 떠난 뒤, 정조는 병이 조금은 나았다고 생각해서 도로 창덕궁으로 돌아오게 했다. 음력 9월 7일부터 14일까지 정조가 경희궁에 거둥했다는 기록이 없는 점을 봤을 때, 의빈은 9월 7일에 창덕궁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조의 기대와는 달리 의빈의 병은 급격하게 위중해졌다. 정조는 의빈이 깨끗하게 씻는 모습을 날마다 직접 가서 보고, 약을 제조하고 달일 때 항상 직접 검열하고, 약봉지와 약그릇을 모두 누워 자는 침실 안에 보관해 놓고 쓰는 등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의빈은 음력 9월 14일 미시(오후 1시~3시)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만삭의 몸으로 사망했다.
"의빈(宜嬪) 성씨(成氏)가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의빈의 상례(喪禮)는 갑신년의 예에 따라 후정(後庭)의 1등의 예로 거행하라.” 하였다. 처음에 의빈이 임신하였을 때 약방 도제조 홍낙성이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하자고 청하자, 출산할 달을 기다려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병에 걸려 졸(卒)한 것이다. 임금이 매우 기대하고 있다가 그지없이 애석해 하고 슬퍼하였으며, 조정과 민간에서는 너나없이 나라의 근본을 걱정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5월 이후로 온 나라의 소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었는데 또 이런 변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
김치인 등이 아뢰기를,
“천만뜻밖의 변고를 당하니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실로 참혹하고 측은하다.”
서명선이 아뢰기를,
“온 나라가 잘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는데 이런 의외의 변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마음이 억눌려서 답답하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고, 전하께는 어찌 아뢰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5월 이후 온 나라의 소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서 4, 5개월 동안 나가지 아니 하였는데 또 이런 변을 당하였습니다. 전하의 마음을 삼가 헤아리면 참혹함을 이르기 어렵습니다. 아직 야간의 침수 절차를 모르는데 어떠셨습니까?”
이에 임금이 말하기를,
“잘 자고 잘 먹어도 마음이 편치 못한 형세는 매우 놀라 움직일만한 일이 별로 없으니 가히 마음이 답답하고 괴롭다. 이제부터 그 뒤,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
김치인 등이 아뢰기를,

1766년부터 후궁의 반열에 둔 의빈이 사망하자 정조는 슬피 울부짖었다. 혜경궁은 정조가 슬픔과 걱정으로 귀한 몸을 손상해서, 정조를 위해 두려워하며 애를 태웠다. 조정에서는 정조를 위로하며 정조 본인 건강을 유의해야 한다고 했다. 같은 해에 문효세자, 의빈, 뱃속의 태아를 잃은 정조의 상심은 너무나 컸다.
정조는 의빈의 상례(喪禮)를 영빈 이씨의 규례대로 후정(後庭) 1등의 예로 거행하라고 분부했다. 하지만 그해 홍역이 유행할 때 비용을 절감해서 문효세자를 예장(禮葬) 하고, 칙명을 전달하는 사신의 행사 때 영접하면서 많은 비용을 썼다. 더군다나 흉년까지 겹치면서 국고는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어렵고, 호조는 재력이 탕진 되었다. 그래서 의빈의 예장(禮葬)에는 규례를 따를 수가 없어서 도감(都監)을 설치하지 못하고 모든 비용을 절감 했다. 음력 9월 16일 묘시(오전 5시~7시)에 중희당에서 의빈을 입관[38] 하고 안현(安峴)의 본궁(本宮)에 빈소를 마련했다. 음력 11월 16일에는 영빈 이씨의 전례에 따라 궁(宮)과 묘(墓)의 제향이 정해졌고, 음력 11월 20일에 효창원 왼쪽 언덕 임좌(壬坐)의 자리에 장사 지냈다.
정조는 의빈의 무덤을 아들 문효세자의 묘 왼쪽 산등성이 임좌의 언덕으로 직접 정했는데 의빈과 문효세자가 죽어서나마 못 다한 정을 나누고 함께 있기를 바라서였다. 후궁 보다 후궁이 낳은 자식의 신분이 더 높고 숙종숙빈 최씨의 묘 자리를 명선공주명혜공주의 묘 근처로 정할 수 없으니 다시 정하라는 명을 내렸던 일과 비교하면 파격적이었다.[39] 더군다나 의빈은 문효세자의 생모여도 엄연히 후궁이고 문효세자는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정조 뒤를 이어 왕이 될 국본(國本)이었다. 본래 효창묘(1870년에 효창원으로 승격) 경내에는 어머니 의빈의 묘가 함께 있었는데 100걸음 쯤 떨어져 있었다. 효창묘 영역은 지금의 효창동, 청파동, 공덕동 일대로 묘역이 굉장히 넓고 송림이 울창했다. 효창묘 남쪽에는 하마비(下馬碑: 누구든지 그 앞을 지날 때에는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알린 푯돌)가 있었다. 본래 의빈묘는 곡장이 삼면으로 둘러져 있고 혼유석, 명등석, 망주석 한 쌍, 문인석 한 쌍, 묘상표석, 비각, 제각이 있었다. 그러나 정조의 뜻이 무색하게 일제강점기 때 의빈의 무덤은 서삼릉 내 후궁 묘역으로, 문효세자의 무덤은 의빈 무덤에서 2 km 떨어진 의령원(懿寧園) 앞으로 강제 이장 당했다.[40]
1786년(정조 10년) 12월 1일, 정순왕후가 언문으로 하교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정순왕후의 하교에 ‘궁빈(宮嬪) 하나가 죽었다고 해서 반드시 이처럼 놀라고 마음 아파할 것은 없지만’이라는 내용은 정순왕후와 의빈이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의빈이 사망했을 때 조정 안팎에서는 상당히 통탄해 했다. 더군다나 “5월 이후로 온 나라의 소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었는데 또 이런 변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라는 말도 실록에 남아 있다. 의빈과 혜경궁이 친밀하고 정순왕후와 혜경궁이 정적 관계였음을 말미암았을 때, 정순왕후와 의빈의 관계 역시 좋지 않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정조는 의빈 사망 당시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는 말을 남겼다. 또, 같은 날 기록된 실록에 '이는 대체로 의빈의 병 증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무슨 빌미가 있는가 의심하였다'라는 부분이 있다.[42] 의학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 정조는 의빈의 죽음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리고 의빈이 당시 내관 이윤묵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의혹이 있었다. 이에 놀란 정조는 의빈의 치상소에서 바로 이윤묵의 목을 베려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죽이지는 않고, 귀양 보냈다. 그러나 정조는 약을 제조하고 달일 때 자신이 항상 직접 검열하였으므로 독살일 리가 없다고 판단, 얼마 뒤 이윤묵을 풀어준다. 대신 이에 연루된 손용득을 친히 신문하여 손용득과 여종 악연을 귀양 보냈다.[43]
1787년(정조 11년) 2월 21일, 전라도 유생인 유학(幼學) 황득중(黃得中) 등 921인이 상소를 올렸다.
1786년(정조 10년) 9월 16일에 의빈의 빈소를 안현(安峴)의 본궁(本宮)에 차렸다.[44] 그래서 안현궁(安峴宮)은 의빈을 가리킨다. 의판(儀版)[3], 일성록(日省錄), 효안전일기(孝安殿日記), 지구관청일기(知殼官廳日記) 등에 기재 되어 있다.
정조 시절에 편찬된 제물등록(祭物謄錄)에 육상궁(숙빈 최씨), 선희궁(영빈 이씨), 의빈궁을 삼궁(三宮)이라고 했다.[45] 이후 1870년(고종 7년) 1월 2일에 의빈의 사당을 희빈 장씨, 정빈 이씨, 영빈 이씨의 사당과 함께 육상궁(숙빈 최씨) 안의 별묘에 봉안 했다.[46] 이와 관련한 내용은 태상지(太常志)에 나와 있다. 사전각제(祀典各祭) 절목에서 대빈궁(희빈 장씨), 연호궁(정빈 이씨), 선희궁(영빈 이씨), 의빈궁(의빈 성씨) 사궁(四宮)이라고 하여 육상궁(숙빈 최씨) 별묘에 함께 봉했다. 사중삭사명일제(四仲朔四名日祭) 조목에는 의빈궁의 제사는 선희궁의 격식과 동일하다고 되어 있다.[47] 그 외, 향수조사책(享需調査冊)[48], 대한예전(大韓禮典)[49], 능안(陵案)[50], 만기요람(萬機要覽)[51], 영선사절목(營繕司節目)[52] 등에도 의빈궁에 대해 나와 있다.
1870년(고종 7년)에 사당의 신주를 옮길 때 인빈 김씨의 사우는 경우궁(수빈 박씨 안의 별묘에 봉안했다. 희빈 장씨, 정빈 이씨, 영빈 이씨, 의빈 성씨의 사우는 육상궁(숙빈 최씨) 별묘 내에 봉안했다. 저경궁(인빈 김씨), 대빈궁(희빈 장씨), 육상궁(숙빈 최씨), 연호궁(정빈 이씨), 경우궁(수빈 박씨), 선희궁(영빈 이씨), 의빈궁(의빈 성씨)은 궁(宮)으로 일컫다가 1898년(고종 35년)에 칠궁(七宮)으로 불렸는데 향수조사책(享需調査冊)에 나타나 있다. 당시 칠궁(七宮)은 왕이나 왕세자를 낳은 생모의 사당이었다. 하지만 1908년(순종 1년) 7월 23일에 제사 제도가 개정되어 의빈궁은 칠궁에서 제외 되고 사당은 매안(埋安: 신주를 무덤 앞에 묻음) 되었다. 다만 의빈궁의 제사는 의소태자문효세자의 원소(園所) 예법을 따랐다. 이후 육궁(六宮)은 1929년에 덕안궁(순헌황귀비 엄씨)이 봉안 되면서 오늘날의 칠궁(七宮)이 되었다.
내가 이르기를,
의빈궁(宜嬪宮)의 치제(致祭)에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가 이미 수향(受香)하고 나갔는가?”
하니, 홍인호가 아뢰기를,
“이미 전향(傳香)하였습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상제(祥祭)의 제문은 일찍이 친히 지어 놓은 것이 있으니, 승지는 해궁(該宮)에 나아가서 충의(忠義)로 하여금 축식(祝式)대로 쓰게 하고, 효창묘(孝昌墓)의 향축(香祝) 및 의빈묘의 향축은 서제소(書題所)에 임시로 봉안하였다가 내일 새벽 묘소에 나아가 조상식(朝上食)을 할 때 섭제(攝祭)를 겸행(兼行)하도록 하라. 섭제 제관은 모두 곧장 나아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53]
정조는 의빈(宜嬪) 사후, 직접 여러 어제문(御製文)을 적었다. 그 중에서 일성록에 정조가 제문을 일찍이 친히 지어 놓은 것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정조는 1786년에 친히 어제의빈묘지명(御製宜嬪墓誌銘)을 내렸다.[54]

빈은 나면서부터 맑고 총명하여 생후 만 1년이 갓 되자 능히 이름을 구별할 줄 알고, 단정한 태도와 자세를 수양하고, 맑고 올곧고, 더욱 상서로이 화기로우며 온화했다. 열 살(영조 38년, 1762년)에 궁중에 들어왔는데 임금의 친척 집안 여인들이 모두 나라에 공로가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집안 혈통으로 알았다. 타고난 기품이 아주 훌륭하게 뛰어나 능히 남을 높이고 자기를 낮췄고 검소하게 절약하며 사용 했다. 심지어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옳은 길을 도회지에서 똑똑하게 분별하고 확고하게 지키니 적지 아니하게 놀랐다.
처음 승은을 내렸을 때 내전(효의왕후)이 아직 귀한 아이를 낳아 기르지 못했다며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이에 감히 명을 따를 수 없다며 죽음을 맹세했다. 나는 마음을 느끼고 더는 다그치지 못했다. 15년 뒤에 널리 후궁을 간택하고 다시 명을 내렸으나 빈은 또 거절 했다. 이에 빈의 노비를 꾸짖고 벌을 내렸고 그러한 뒤에 비로소 내 명을 받들어 당석(자기 차례가 돌아온 날 밤에 잠자리를 같이 함) 했다. 그 달에 임신함으로써 임인(1782년) 9월에 세자를 낳았다. 이해 소용으로 봉해졌고 귀한 아들로 하여금 빠르게 품계가 올라 의빈이 되었다. 빈은 자기 의견만 옳다고 여기는 바를 더욱 스스로 억눌렀다. 내전(효의왕후)을 대할 때는 온 마음을 다하여 예를 갖추고 두려워하고 존경하며 섬겼다. 시침(임금을 모시고 잠) 할 때는 "이제부터 국세를 의탁할 데가 있지만 위로 내전이 있고 또 후궁이 있습니다."라며 또 번번이 당석이 잘못 되었다며 사양하고 거절하며 피했다.
내전(효의왕후)은 그 자식을 이미 받아들였고, 양육 할 때는 반드시 생모에게 맡겼는데 조정에서 예로부터 전해오는 규칙과 정례였다. 빈은 감히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여 처리하지 않고 내전을 따랐고 내전은 빈으로 하여금 기르게 하고 점차 자라기를 기다렸다. 빈은 세자를 어루만질 때는 생각하여 몸과 마음가짐을 조심했고, 밤에는 반드시 아침이 밝을 때까지 밝은 촛불을 두었고, 잘 때는 옷을 벗은 적이 없었는데 5년 동안 한 결 같았다. 또 나날이 천한 일을 몸소 했고, 말을 할 때는 극진히 존중히 여기고 공경했다.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면 빈은 "왕세자는 내전(효의왕후)의 아들입니다. 내가 낳았다고 어찌 감히 스스로를 높이겠습니까?"라고 했다. 빈의 거처는 겨우 비바람을 가리어 막고, 의복과 음식은 될 수 있는 대로 얼마 되지 않아 변변하지 못하게 했다. 이에 "지금 지체가 높고 귀한 신분은 이미 나에게는 과분합니다. 도리어 스스로를 자랑하고 방자하게 행동한다면 어찌 더욱이 몸에만 재앙이 든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동궁이 복을 오래 누릴 수 있도록 생활을 검소하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처음 (1786년) 5월에 변고가 일어나고 떠나보낼 때 말과 얼굴빛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람이 혹 괴이하게 여겨 어찌 개의치 아니하냐고 물어보니 "내 몸은 내 몸이 아닙니다. 지금 보는 나라는 위태함이 위엄이 머리카락과 같습니다. 다행히 내가 임신 했지만 늘어놓고 슬퍼하고 이와 같이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내가 자연스럽지 못한 것과 같아 나라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헌데 어찌하여 병이 들었단 말인가? 증세는 의술과 약으로 고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해산할 달에 기력이 가라앉았는데 매일 세수할 때 내가 가서 보고 살폈다. 정신은 혼미하여 어지럽고 사지는 움직일 수 없어도 나를 대할 때는 몸가짐을 조심하고 용모를 단정하게 하고 기운을 내서 메아리처럼 응답했다. 임종하기 전날 저녁에 내가 가자 갑자기 슬퍼하고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며 청했다. 이에 내가 꾸짖으며 "평상시 나를 볼 때는 근심 어린 얼굴이 아니었는데 오늘은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라고 물었다. 빈이 말하기를 "앞서서 내전(효의왕후)께 아들이 생긴 경사는 축복이었습니다. 천신(신하가 임금 앞에서 자기를 낮추어 이름)이 다시 자식을 가져서 종사는 매우 다행이지만, 사심을 마음속으로 억눌러 견뎌내지 못하여 근심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복이 지나치게 과분해서 끝내 병이 중해졌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마음에 차지 않으나 오직 오래도록 지닌 소원은 죽을 고비에 임하여도 아직 얻지 못하여 근심입니다. 그러니 정전에 자주 가시어 대를 이을 아들을 부지런히 구하면 경사가 있을 것이니, 장차 땅속에서도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나는 감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일어나 옷을 바르게 하고 자리에 나아가서 내가 들어가서 보니 이미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내전(효의왕후)은 빈이 진실로 나라를 위했다며 정성스럽게 말했는데 거짓됨이 없었다. 지난날을 생각하건대 어찌 아닐 수 있었겠는가? 이와 같이 죽음을 잊지 아니하고 맛보는 일과 언행을 조심했는데 빈의 죽음을 슬퍼하고 정성껏 임하는 태도와 마음은 매우 친밀하여 자매를 잃은 마음이었다. 온 궁 안 사람이 모두 빈의 죽음을 한탄하여 한숨 쉬고 슬퍼하며 애처로워했고 통곡하며 부르짖었다.
빈이 작위를 받고나서 나는 더 엄하게 단단히 단속하여 이따금 사람이 견디지 못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빈은 한 뜻을 기쁘고 좋게 웃어른의 명령을 좇았다. 일이 혹 더욱 은혜에 해당 되면 위축되어 더욱 멀리하고 견지 했으니 자못 겸손했다. 빈의 선산 터가 이롭지 못하여 의논하여 이장하자고 하자 빈이 간하여 말하기를 "천한 집안의 일에 감히 마음대로 안배하여 번잡하게 관청의 돈을 쓰는 것은 사사로운 개인의 뜻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것은 중한 바인데 네가 불가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바라건대 스스로 의복을 팔아서 이장 비용에 보태라."고 일렀다. 동궁의 외가 사친은 규정에 따라 증 찬성에 추증하지만 나는 이전에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5월에 문효세자가 죽고 난 뒤에 비로소 교지를 내렸는데 빈은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며 한 집안 사람으로서 분황(죽은 사람에게 벼슬이 추증되면 행하는 의식)을 예로서 중지 할 것을 청하며 말하기를 "벼슬을 더 높여서 내려주는 것은 곧 국가의 법전이 있는 바인데 감히 전하께서 내려주는 물건을 받을 수 없습니다. 또 뜻밖에도 어찌 감히 장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내가 빈이 매양 애석해서 따뜻한 밥과 비단, 모시를 내렸으나 도리어 궁의 희빈(姬嬪)만 못하였다. 비록 자기를 굽히고 의지를 꺾어 검소함을 따랐으나 오히려 가난하고 군색함을 염려하며 궁중 사람에게 늘 너그러이 빌려줬다. 결국에 가서는 세상을 떠나자 상자에는 남은 비단이 없어서 염습할 때 모두 시장에서 가져왔고, 살아생전에는 은수저를 만들지 않아서 반함(염습 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과 씻은 쌀을 물림)을 할 때 버드나무로 대신 했다. 궁인들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지며 말하기를 "빈이 그 청빈함을 잘 알고 지키니 마침내 이에 이른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빈의 두 오라버니는 곤궁하여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였으나 사심으로 관여한 적이 없었다. 내가 "조정의 관작은 진실로 부당하게 남수(정해진 범위를 벗어나게 벼슬이나 물품 따위를 함부로 마구 줌)하는데 너는 어찌하여 남는 녹봉으로 저 배고픔과 추위를 구원하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빈이 걱정하는 모양으로 대답하길 "궁방이 세워진 이후 한 물건도 제멋대로 쓰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사가의 천인에게 재물의 은덕을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런 이유로 빈의 장례 때 그 친족은 다른 사람에게서 옷과 신발을 빌렸다. 궁빈의 사친은 관직명이 없는 사람은 궁중 출입을 허락을 받을 수 없으나 오래 전부터 본궁에서 접견하라고 허락했었다. 그러나 빈이 본궁에 나가 기거 하면서 사친과 여러 해 동안 격조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문 앞에 이르지 못하게 했다. 말하기를 "올 때 임금에게 여쭈고 아뢰어 뜻을 받들지 아니 하고서는 감히 불러내어 만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무릇 형제가 몹시 가난하여 어찌 할 수가 없어서 의탁하고자 하면 가족과 떨어지고자 했다. 단란함은 사람이 항상 품고 있는 심정인데 빈은 어찌 오직 다른 사람과 다르단 말인가. 내가 내린 명령은 한 가지 일이라도 마음대로 하지 않고 조심히 정성껏 지켰는데, 이는 실제로 사실을 경험했다. 궁에서 산지 20여년인데 일찍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좋지 않은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혹여 말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거나 의심을 접하면 반드시 자세하고 소상하게 하여 스스로 완전히 타당함에 이르게 했다.
나는 보통 때 집안 밖의 일을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빈도 역시 상황을 따르며 술잔을 주고받는데 익숙하고 내명부에 대해 꺼내지 않았다. 내가 혹 처소에 도착할 때면 궁중의 계집종들은 모두 황급히 숨어 감히 나아가지 않았다. 자기 스스로 뉘우치고 경계함에 힘썼고 아랫사람을 엄격하게 다스리는 것도 이와 같았다. 길쌈에 민첩하고, 요리를 잘 하고, 다른 일도 가까이 하여 붓글씨도 역시 스스로 범상함을 넘었다. 수리 학문을 익히면 능히 알아차리고 모두 이해했고, 정신과 식견은 느끼는 곳마다 밝은 지혜가 열려 도를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재능과 기예도 완전히 갖추었을 따름이다. 아아, 빈의 장사(葬事)에 반드시 내가 비석에 새기는 글을 지었다. 어찌 재주와 얼굴을 잊지 아니하겠는가.
나는 궁액(각 궁에 있던 하인)을 엄히 다스리고 가까운 사람에게 가혹하게 대하는데 일을 주면 헤아려서 명령을 받드는 일이 적었다. 빈을 후궁 반열에 둔지 20년인데 단단히 타일러서 잘못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조심하게 했다. 이에 곧 명심하고 작은 실수도 하지 않고 조심하며 응대하였는데 법도가 저절로 있었고,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으니 마땅히 출중했다. 이것은 뛰어난 현인도 분명히 어렵다. 본분을 각별히 정성껏 지키며 신분의 엄격함을 뚜렷하고 분명하게 하였다. 사사로이 윗사람을 찾아가서 청탁하는 일을 경계하고 엄히 끊어내고 가득 이루어놓음에 있어서 염려하였는데 이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에 이른 것이 크고 옳고 그름이 매우 분명하지만 감히 입을 열 수 없고, 일이 되어가는 형세는 손을 댈 수 없으면 능히 오랫동안 정성을 쌓고 있는 힘을 다해 곧바로 나아가 물러서지 않았다. 가진 것의 의리로 하여금 끝내 마땅히 바른 곳으로 돌아가게 하니 이는 책을 읽은 사대부가 쉽게 갖추지 못하는 바이다. 만약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일에 능하고 절개와 지조가 있다고 여기고 전하여져서 당대의 미담이 될 것이다.
후일 빈의 상론(고인의 언행, 인격을 평가함)은 이와 같다. 빈의 출신은 가난하고 지체가 변변치 못하여 스승에게 배우지 못하고 후궁이 되었지만 학문을 배우지 않아도 알았다. 내전(효의왕후)을 위해 힘과 마음과 정성을 다한 것은 하늘과 땅이 마땅히 알고 금석(쇠붙이나 돌로 만든 기구)도 가히 뚫을 수 있을 것이다. 빈은 높음과 귀함, 임금의 은덕을 입은 영광을 즐거움으로 삼기에 거듭 부족하다고 했다. 마음에 잊히지 않는 정성으로 매우 간절히 청하며 반드시 내전에게 정성을 다하겠다고 하며 더구나 장차 상심하고 슬피 울면서 평생 동안 내전을 따르겠다고 지극히 바랐다. 비록 옛날에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하는 충정이지만 배에 칼을 꽂은 정성도 이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빈은 덕을 실천하고 지키는 마음은 그 무엇과도 섞이지 않고 온전히 드러냈으니 이는 본디 그대로의 것에서 드러났음을 경험 할 수 있다. 이에 마땅히 낳은 어진 아들은 영광된 왕세자가 되고, 공을 세워서 국세가 태산과 반석처럼 편안하고, 경사로이 자식을 길러 왕족이 번창되어야 할 터인데 나라의 운세가 불행하고 신의 이치가 크게 어그러져 갑자기 올해 여름 문효세자가 죽은 변이 있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뱃속에 있는 아이와 하루아침에 죽었으니 빈의 흔적은 장차 이 세상에서 아주 사라질 것이다. 이 뛰어난 언행을 내가 글로 적지 않는다면 누가 그것을 전하고 알려서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애석하다고 하겠는가? 이는 빈에게 한이 되고, 문효세자에게도 한이 될 것이다. 이에 대략 찬차(시문을 가려 뽑아서 순서를 매김) 하였는데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이 글이 길어졌다.
그대 빈은 계유년(1753년)생이고 향년 34세이다.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문효세자이고 딸은 해를 못 넘기고 죽었다. 빈의 본관은 창녕이고 고려 때 중윤 직위를 맡은 성인보가 시조이다. 인보의 아들은 문하시중으로 지낸 송국이다. 그의 증손은 검교의 정승으로 문정공이고 자는 여완이다. 여완의 큰 아들은 석린이고, 둘째 아들은 석용이며, 셋째 아들은 석인이다. 성석인은 예조판서와 대제학 직위에 올랐었고 시호는 정평인데 이 사람이 빈의 선조다. 그러나 이후 집안이 중간에 계보를 잃어버렸다. 7대조 만종은 제릉(태조의 정비 신의왕후 한씨의 무덤) 참봉이고, 고조 성경은 군자감 정이다. 빈의 아버지는 증 찬성 윤우이고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임씨인데 통례원(조선시대 국가 의례를 관장한 관서) 인의 임종주의 딸이다.
정조는 1786년에 직접 의빈의 사적 및 덕행을 기리는 글을 썼다.[55]
빈은 사망하기 전날 밤에 옷섶을 정리하고 눈물을 흘리며 내게 “국가의 자손 번창 소망이 효의왕후가 아닌 천한 몸에서 나왔는데 병에 걸려 죽으니 이는 감당할 수 없는 재앙입니다. 이제부터 자주 효의왕후에게 거둥하시어 부지런히 대를 이을 아들을 바란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일찍이 효의왕후가 자식을 낳고 기르며 지내지 못 한 것을 항상 근심하고 탄식했다. 승은을 받기 시작할 때는 감히 효의왕후를 대신 하여 당석(잠자리) 할 수 없다며 간절히 사양했다. 내가 잠시 틈을 타서 무언가에 빗대어 재치 있게 경계하거나 비판해도 한 결 같이 온통 매우 간절했다. 더구나 빈은 숨이 끊어져갈 쯤에도 오히려 기운을 내서 마음속에 있는 진심을 완연히 전하니 감동 받기에 충분했다. 나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얼굴 표정을 고치고 약속하겠다고 했다.
내가 보건대 예로부터 첩이 시침하는 것을 보면 지체가 높고 귀한 사람은 항상 정위(정실)가 자신을 핍박하고 근심하게 만든다고 했다. 이에 정실을 업신여기고 욕되게 하였다. 빈은 병을 앓다가 죽음을 직면했을 때 사랑에 끌려 잊지 못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사후에 사사로운 사랑에 얽매이는 총애를 받는 영광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빈의 권력과 부귀는 스스로 높여서 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빈은 죽음을 단연코 근심하지 않았다. 다만 한 결 같이 마음을 다하여 효의왕후가 반드시 소망을 이룰 것이라고 믿었다. 그 현명함이 어찌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빈은 문효세자를 낳았으나, 스스로 왕세자의 어머니라고 내세우지 않고 겸손하게 자신을 억제했다. 처소는 수리하지 않고 의복을 입고 음식을 먹는데 있어서는 검소하게 절약하며 지냈다. 그리고 의빈은 “내가 지금 어긋난다면, 내가 감히 복을 바라고 아주 작은 사치라도 부리면 내 몸에 재앙이 있을 것이다. 이를 논할 겨를이 없는데 어찌 문효세자의 석복(생활을 검소하게 하여 복을 오래 누리도록 함)을 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엄히 다스려서 허둥지둥 일을 처리하게 한 적이 없었다. 때때로 은총을 받는 사람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을 만큼 엄하게 다스렸다. 하지만 빈은 몸가짐과 언행을 조심하고 지키며 임금이 내린 명령을 두려워 하는 기색 없이 분명하게 해냈다. 또한 내내 게으른 적이 없었다. 빈은 궁궐 처소에서 지낸지 20년이다. 부정하게 남에게 재물을 주는 자를 우러러보지 않았으며 효의왕후로부터 특별한 친애를 받았다. 빈을 잃은 효의왕후의 울음은 대단히 우애가 좋은 형제를 잃고 근심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세상에 빈과 같은 사람이 어찌 많겠는가. 
빈은 영조 29년, 계유 7월 8일(1753년 음력 7월 8일) 생이고 득년(향년) 34세다. 본관은 창녕이며 고려 때 중윤 직위를 맡은 성인보가 비조(시조)이다. 성인보의 아들은 시중으로 지낸 성송국이다. 시중의 증손은 검교의 정승으로 문정공이며 자는 여완으로 시사했다. 나는 빈의 집안 맏아들이 조상이 엄습하여 세상이 명망이 있는 집안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후 번창하던 집안이 중간에 쇠퇴하였다가 제릉참봉 성만종으로 하여금 비로소 집안이 벼슬길에 나아갔다. 하지만 또 다시 삼대 동안 벼슬에 나가지 못하다가 성정경이 군자감으로 지냈는데 곧 빈의 7대조로 고조부와 같다. 빈의 아버지는 증찬성 성윤우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임씨다. 빈의 부모는 법도에 따라 추증 되었는데 이는 문효세자의 외조부모였다.
저 지체가 낮고 천한 여염(백성의 살림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 이 같이 빼어난 사람이 태어나서 세자를 낳고 영화로움을 받들어 빈의 자리에 올랐으니 마땅히 우연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문효세자의 무덤에 흙이 마르기도 전에 빈이 뱃속의 아이와 함께 급히 세상을 떠났다. 내가 죽음을 슬퍼하며 아까와함은 특별히 빈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빈이 세상을 떠난지 세 달이 되는 경인에 고양군 율목동 임좌(묏자리)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는데 문효세자의 묘와 백 걸음 정도 떨어져 있다. 이는 빈의 바람을 따른 것인데 죽어서도 빈이 나를 알아준다면 바라건대 장차 위로가 될 것이다. 내가 빈의 언행을 표본으로 하여금 기록하여 광중(시체가 놓이는 무덤의 구덩이 부분)에 묻고 묘비에 요점만 간단하게 요약해서 썼다. 찾아오는 사람이 빈의 현명함을 애석해 하도록 할 따름이다.
의빈 사후 1786년(정조 10년) 정조가 직접 쓴 글이다. 제축문이란, 제사를 지낼 때 신명에게 고하는 글월을 말한다.[56]
계빈전
건륭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19일 기축, 국왕은 금성위 박명원을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 "세월이 빠르고 세차게 흐르는 동안 속세의 머뭇거림이 있었는데 좋은 화살로 하여금 궁독(아들을 낳았을 때 천지 사방을 향해 활을 쏘아 축하하는 뜻을 취함)을 완연히 드러냈다."
조전
건륭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19일 기축, 국왕은 금성위 박명원을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 "상여를 따라가니 기약을 져버림에 이르렀구나. 아! 장자 이 길을 어찌 가겠는가?"
견전
건륭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수어사 서유녕을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나는 글로서 너를 보내며 예장(禮葬)을 맡은 관원들이 도와서 상여가 무사히 무덤에 이르기를 바란다. 살아 있는 나와 죽은 네가 끝없이 오랜 세월동안 영원히 이별하니 나는 못 견딜 정도로 근심과 걱정이 많다."
노제
건륭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행부사직 서유경을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 "관머리 앞에 만시(挽詩)를 세우고 길에 휘장을 두르고 제사를 지내는구나. 밤 동안 한가득 걱정하다가 아침에 보내니 장차 서두르지 마라."
묘소성빈전
건륭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우승지 홍인호를 보내서 글월로 타이르기를"상자를 열어 비단옷을 일렬로 늘어놓으니 흰 휘장이 소용돌이치는구나. 우수수 하고 부는 바람 소리에 슬퍼하며 밤에 술잔을 올렸다. 네가 홀연히 죽어서 보고 싶다고 바라여도 볼 수 없구나. 혼령이 부드럽고 유연하게 흠향하길 바란다. 아, 너는 뒤섞여서 너의 몸에서 아들이 태어난 것을 두려워했었다."
묘소계빈전
건륭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우부승지 홍명호를 보내서 글월로 타이르기를 "새벽닭이 울 때 망건을 꿰매달라고 재촉하면 물이 그득 흘러가는 모양으로 봤는데 아침에 혁옥을 타고 흐른 물은 저 어둠이 내린 산으로 떠나 가버렸다. 아주 오랜 세월을 따른 촉룡(계절, 기후 같이 대자연의 섭리를 주관하는 신)이 너를 저승으로 환하게 인도 할 것이다."
사후토전
건륭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총융사 김사목을 보내서 글월로 타이르기를 "땅의 신이여. 지금 의빈 성씨가 여기 고양군 율목동 효창묘의 왼쪽 언덕 임좌의 자리에 비어 있는 무덤으로 갑니다. 빈의 행동은 얌전하고 정숙하여 감출 것이 없으니 이에 현숙한 여인의 한 골육이 있는 언덕은 신 역시 위해줄 것입니다. 얼굴에 근심스러운 빛이 있어 재앙이 있다고 꾸짖어도 작은 힘으로 뒤의 어려움을 아주 명백하게 물리칠 것입니다. 천 가지를 삼가고 깨끗한 술과 제물을 차려놓고 신에게 공경히 올리오니 부디 흠향하여 주십시오."
임광전
건륭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우승지 서정수를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 "나는 바짝 이제 와서 네가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확정 짓지 못하고 있다. 슬프고 슬픈 사람의 마음은 매여 있지 않은 것 같다."
제주전
건륭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우승지 홍인호를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 "형체는 이미 넋이 되어 모두 돌아 가버렸다. 만일 여기로 와서 무탈하게 편안히 단장 하고 저 집에 있으면 좋으련만 어찌하여 저 어두운 언덕 구석으로 가서 혼령이 되어버렸는가. 임금이 완연히 기댔는데 어찌하여 아이들은 태어나고 멀리 가버렸으며 더욱이 또한 그 어머니마저도 멀리 가버린단 말인가."
초우전
건륭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금성위 박명원을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은 머무르지 않아 빈을 위로하며 반우(反虞)를 지낸다. 이로써 이 길을 따라 무사히 사당에 이르기를 청한다. 깨끗한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재우
건륭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1일 신묘, 국왕은 금성위 박명원을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은 머무르지 않아 빈을 위로하며 재우(再虞)를 지낸다. 가는 세월에 빈의 자취가 있던 곳에서 모두 함께 울었다. 이로써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삼우
건륭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2일 임진, 국왕은 행부사직 서유녕을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은 머무르지 않아 빈을 위로하며 삼우(三虞)를 지낸다. 가는 세월에 빈의 자취가 있던 곳에서 모두 함께 울었다. 이로써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졸곡
건륭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2일 갑오, 국왕은 금수어사 서유녕을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은 머무르지 않아 빈을 위로하며 졸곡(哭萬)을 지낸다. 빈은 온갖 일을 겪고 뱃속의 아기와 함께 세상을 떠나버렸다. 내 마음 속에 품은 정을 어찌 다할 수 있겠는가. 이로써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초전
건륭치세 모갑 모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은 덧없이 가버리는구나. 이미 캄캄해지고 나니 또한 초하루가 되었다. 빈이 한 번 떠나버리더니 돌아오지 않아 속죄 할 길이 없어 한탄스럽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망전
건륭치세 모갑 모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하늘의 때는 이처럼 갑자기 그 달 동안 위태로워졌다. 아무리 그러하더라도 빈이 남긴 행적에 대한 마음을 어찌 다하겠는가?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생신차례
건륭치세 모갑 모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어떠한 생각도 못했는데 홀연히 또 빈의 생일이 왔다. 어찌하여 오래 살지 못하고 생일에 제사상을 받는가. 빈과 즐겁게 노닐었는데 적막하고 고요해졌다. 생각하건대 빈은 난초와 혜초처럼 향기로운 풀로서 아름다운 자질을 가졌다. 고단하여 몹시 기운이 없는 채로 지난날을 생각하니 내가 무료 할 때 빈을 보고 이야기 하면 서로 더욱 뜻이 맞고 정다웠었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정조
건륭치세 모갑 정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이리저리 흘러 오늘 정조(正朝)에 제사를 지낼 때 되니 돌이켜 옛날을 생각하면 근심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진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한식
건륭치세 모갑 정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이리저리 흘러 오늘 한식(寒食)에 제사를 지낼 때 되니 돌이켜 옛날을 생각하면 근심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진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삼일
건륭치세 모갑 모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이리저리 흘러 오늘 삼일(三日)에 제사를 지낼 때 되니 돌이켜 옛날을 생각하면 근심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진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단오
건륭치세 모갑 5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이리저리 흘러 오늘 단오(端午)에 제사를 지낼 때 되니 돌이켜 옛날을 생각하면 근심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진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추석
건륭치세 모갑 8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이리저리 흘러 오늘 추석(秋夕)에 제사를 지낼 때 되니 돌이켜 옛날을 생각하면 근심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진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정조
건륭치세 모갑 정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이리저리 흘러 오늘 정조(正朝)에 제사를 지낼 때 되니 돌이켜 옛날을 생각하면 근심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진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한식
건륭치세 모갑 정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이리저리 흘러 오늘 한식(寒食)에 제사를 지낼 때 되니 돌이켜 옛날을 생각하면 근심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진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삼일
건륭치세 모갑 3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이리저리 흘러 오늘 삼일(三日)에 제사를 지낼 때 되니 돌이켜 옛날을 생각하면 근심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진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단오
건륭치세 모갑 5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이리저리 흘러 오늘 단오(端午)에 제사를 지낼 때 되니 돌이켜 옛날을 생각하면 근심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진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추석
건륭치세 모갑 8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이리저리 흘러 오늘 추석(秋夕)에 제사를 지낼 때 되니 돌이켜 옛날을 생각하면 근심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진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건륭치세 모갑 9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이리저리 흘러 오늘 제사를 지낼 때 되니 돌이켜 옛날을 생각하면 근심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진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동지
건륭치세 모갑 모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이리저리 흘러 오늘 동지(冬至)에 제사를 지낼 때 되니 돌이켜 옛날을 생각하면 근심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진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중춘
건륭치세 모갑 2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음력 2월에 빈을 사려(思慮)하며 제사를 올린다. 궁궐 기상(禨祥)이 굽어 들어 신리(伸理)하는데 마땅히 감통(感通)한다. 이에 깨끗한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중하
건륭치세 모갑 5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음력 5월에 빈을 사려(思慮)하며 제사를 올린다. 궁궐 기상(禨祥)이 굽어 들어 신리(伸理)하는데 마땅히 감통(感通)한다. 이에 깨끗한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중추
건륭치세 모갑 8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음력 8월에 빈을 사려(思慮)하며 제사를 올린다. 궁궐 기상(禨祥)이 굽어 들어 신리(伸理)하는데 마땅히 감통(感通)한다. 이에 깨끗한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정조는 죽은 의빈을 위해 제축문을 썼다.[57]
건륭치세 모년 세차 모갑 모월 모삭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날이 가고 달이 가더니 훌쩍 초하루에 이르렀다. 아득해진 하소연을 이제야 헤아려보니 슬프고 애통한 마음을 어찌 견뎌낼 수 있단 말인가? 이에 깨끗한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망제
건륭 모년 세차 모갑 모월 삭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달이 차고 기우는 저 아득한 세월에 내 마음은 허전하고 애달프다. 이에 깨끗한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생신다례
건륭 모년 세차 모갑 7월 삭모갑 삭초 8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아이들의 어머니인 너의 세월은 이 하지에 이르렀으나 틀림없이 죽었으니 감흥이 북받쳐 누를 길이 없구나. 어찌하여 오지 않는 것인가? 이는 네가 문효세자를 그리워하며 슬퍼하는 일 뿐만이 아니구나. 애오라지 마음속 깊이 명확하게 알고 있는가? 알지 못하는가? 이에 깨끗한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정조
건륭 모년 세차 모갑 모월삭 모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머무르기 어려운 건 흐르는 세월이라더니 어느새 저 절기가 돌아옴을 느끼는구나. 이때 밀어 저 향기로운 꽃을 꺾어 올린다. 이에 깨끗한 술과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한식
선륭 모년 세차 모갑 정월삭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머무르기 어려운 건 흐르는 세월이라더니 어느새 저 절기가 돌아옴을 느끼는구나. 이때 밀어 저 향기로운 꽃을 꺾어 올린다. 이에 깨끗한 술과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삼일
건륭 모년 세차 모갑 3월 모갑삭 3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머무르기 어려운 건 흐르는 세월이라더니 어느새 저 절기가 돌아옴을 느끼는구나. 이때 밀어 저 향기로운 꽃을 꺾어 올린다. 이에 깨끗한 술과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단오
건륭 모년 세차 모갑 5월 모갑삭 5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머무르기 어려운 건 흐르는 세월이라더니 어느새 저 절기가 돌아옴을 느끼는구나. 이때 밀어 저 향기로운 꽃을 꺾어 올린다. 이에 깨끗한 술과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구일
건륭 모년 세차 모갑 9월 모갑삭 9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머무르기 어려운 건 흐르는 세월이라더니 어느새 저 절기가 돌아옴을 느끼는구나. 이때 밀어 저 향기로운 꽃을 꺾어 올린다. 이에 깨끗한 술과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동지
건륭 모년 세차 모갑 모월 모갑삭 모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머무르기 어려운 건 흐르는 세월이라더니 어느새 저 절기가 돌아옴을 느끼는구나. 이때 밀어 저 향기로운 꽃을 꺾어 올린다. 이에 깨끗한 술과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중춘
건륭 모년 세차 모갑 모2월 모갑삭 모월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음력 2월 때에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계절에 따라 나는 산물을 올리는데 상념이 여러 번 바뀌는구나. 이에 깨끗한 술과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중하
건륭 모년 세차 모갑 모5월 모갑삭 모월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음력 5월 때에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계절에 따라 나는 산물을 올리는데 상념이 여러 번 바뀌는구나. 이에 깨끗한 술과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중추
건륭 모년 세차 모갑 모8월 모갑삭 모월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음력 8월 때에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계절에 따라 나는 산물을 올리는데 상념이 여러 번 바뀌는구나. 이에 깨끗한 술과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중동
건륭 모년 세차 모갑 모11월 모갑삭 모월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음력 11월 때에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계절에 따라 나는 산물을 올리는데 상념이 여러 번 바뀌는구나. 이에 깨끗한 술과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납일
건륭 모년 세차 모갑 모21월 모갑삭 모월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납일 때에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계절에 따라 나는 산물을 올리는데 상념이 여러 번 바뀌는구나. 이에 깨끗한 술과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기일

정조는 죽은 의빈 성씨를 위해 치제제문을 썼다. 치제(致祭)란 윗사람이 제사 때 올리는 음식과 죽은 사람에 대해 슬픈 뜻을 표하는 글을 내려서 죽은 아랫사람을 제사하는 일이다. 제문(祭文)이란 제사 음식을 올리고 제사 때 읽는 글을 읽는 일이다.[58]
국왕은 의빈 창녕 성씨의 영혼에 유제하니 다음과 같다.
아! 나는 빈의 죽음에 더더욱 이와 같이 슬프다. 죽음으로서 떠나보낸 재앙은 비통하고 참혹하며, 인정과 도리는 끊어질 듯이 아픈 마음이 문효세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우는 것보다 심한 일이 없었다. 하지만 오로지 위로하고 애써 떨쳐 내면서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더위와 추위가 바뀌어갔다. 평상시처럼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근심하지 않는 얼굴로 서로 잊고 지내는 듯했는데 빈의 죽음 때문에 이와 같이 슬프다.
아! 빈은 문효세자의 어머니이고 빈이 뱃속에 품은 아이는 문효세자와 같은 기운을 가졌다. 문효세자는 이 아이를 보지 못했지만, 어머니에게 반드시 친밀감을 가지고 소중히 대하며 애틋하게 여기고 그리워하기를 구했을 것이다. 또한 형제가 틀림없이 매우 비슷하고 꼭 닮기를 기대 했을 것이다. 끊어질 듯이 아프고 비참하며 비통한 마음을 위로할 길은 여기에 있고 도리를 떨쳐낼 방법도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빈이 뱃속의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뱃속의 아이 또한 세상을 떠나버렸으니 문효세자의 남은 흔적과 향기는 쓸어버리듯이 사라져버렸다. 장차 내가 어찌 구하고, 어디에 기대고, 끊어질 듯이 아프고 비통하며 비참한 마음을 어찌 위로하고, 어찌 달래겠는가? 이에 있어서 지금의 슬픔이 거의 예전의 일보다 심하다. 내가 슬퍼하는 마음이 어찌 오직 빈의 죽음에 대한 슬픔뿐이겠는가?
아아! 후궁으로 있으면서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길을 알았으니 어질고 총명하여 성인(聖人)의 다음 가는 사람과 같았다. 지체가 높고 귀한 자리에서 몸가짐과 언행을 조심하고 검소함을 지켰다. 이에 마땅히 복을 받아야 하는데 문효세자를 잃고 겨우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 뱃속의 아이와 함께 잘못 되어 세상을 떠나버렸다. 빈의 운명은 그것도 이것과 마찬가지로 심히 불쌍하고 슬프도다. 이제 장차 빈을 문효세자의 곁에 보내서 장례를 치르는데 이는 빈의 한결같은 소망이다. 무덤이 아주 가까워졌으나 넋은 막힘없이 잘 통하여 끝난 세상을 원통하게 울면서 사별한다. 이로써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서로 영원히 헤어지는 한을 위로한다.
너 또한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할 것이다. 그러한가? 그렇지 않은가?
본가 창녕 성씨(昌寧 成氏)
왕가(王家 : 전주 이씨)
정조와 의빈의 장남인 문효세자의 세자 책봉 때, 청나라 황실은 문효세자의 장수를 기원하는 미얀마산 옥불을 선물했다고 한다. 정조는 이 옥불을 보관하기 위해 승가사를 중건했으나 오늘날 그 옥불은 어디에 있는 지 알 수 없다.[71]
1787년 5월 1일: 의빈묘(宜嬪墓)를 두루 살폈다.[73]
1788년 4월 29일: 의빈(宜嬪)의 묘에 임하여 전작(奠酌)했다.[74]
1788년 9월 7일: 의빈묘(宜嬪墓)에 임하여 전작(奠酌)했다.[75]
1788년 11월 5일: 의빈묘(宜嬪墓)에 나아가 전작례를 행하였다.[76]
1789년 4월 25일: 의빈묘(宜嬪廟)에 두루 나아가 묘내(廟內)를 둘러보고 의빈묘(宜嬪墓)에서 다례를 행하였다.[77]
1789년 4월 26일: 의빈묘(宜嬪廟)에 들러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78]
1789년 12월 28일: 의빈묘(宜嬪廟)에 들러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79]
1790년 3월 15일: 의빈묘(宜嬪墓)에 들러 잔을 올렸다.[80]
정조는 의빈의 묘지나 사당에 거둥(왕의 행차) 할 때면 문효세자의 묘지나 사당에도 함께 거둥했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의 이름이 거둥고개가 되었다.[82]
마포구 신공덕동에 있던 마을로서, 지금은 효창공원이 된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와 그의 생모인 의빈 성씨의 묘소인 효창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마을 이름이었다. 효창원의 봉분을 멀리서 보면 홍예(무지개)처럼 보이기 때문에 홍예분(紅霓墳)이라고도 하였다.[83]
조선 정조대의 문신 이재 황윤석이 쓴 《이재난고》에 의빈의 본명, 가족관계 등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정조가 의빈의 병이 이상하다고 했는데, 이재난고에서 의빈이 자현증이 있었다고 한다. 화빈 윤씨효의왕후를 분수에 지나치게 질투했고 의빈을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저주했고 그 죄로 인해 대궐 안에 엄히 가두어졌었다.[86] 그 이후 화빈 윤씨는 독을 썼다는 의혹으로 60세에 졸할 때까지 행적이 없다.[87]
혜경궁은 곁에 두고 친히 기른 며느리 의빈이 문효세자를 낳을 때 친정에서 데려온 유모 아지와 몸종 복례를 보내 해산을 도왔다. 정조 역시 아지와 복례의 공을 치하했다.
한중록에 의빈의 죽음이 짧게 언급되어 있다.
순조의 지은 문집 《순재고》 6권에[88] <의빈묘견내시치제제문>[89] <의빈회갑일치제제문계유>[90] 있다.
오호라 이 궁은 아주 경사스러움에 마땅하다.
빈은 능히 어진 덕을 가져서 일찍이 성상(정조)께서 칭찬하고 좋은 일에 힘쓰도록 북돋아주었다.
병오년(1786년)의 변고를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좋은 때에 배향하고 회갑을 맞이하는 생일에 마침 세월에 간절히 느낀 바를 쓰고 잔을 드리게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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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굿굿!! chic_ch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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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참~~ 뒤에 아저씨 비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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